무엇이든 계속된다는 것은 주위를 메마르게 한다. 그는 익숙해진다는 의미로 변해 그 감정과, 그에 맞게 이어진 행동과, 순간 만개한 모든 기억의 발단과 존재자체를 잊고 그저 현재 상황을 한탄하게 했다. …마치 계속 이어져온 능력자와 비능력자와의 갈등처럼. 흐지부지된 채로 형태를 잃은 감정은 대를 이어가며 새로운 모습으로 몸을 굳혔다.
연합과 회사와, 수많은 세력들이 능력자들을 앞세워 각자의 신념을 내뱉으며 걸어가던 길은 의미 없는 발걸음으로 시작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고, 결국에 모든 껍데기를 내던지고 공공연하게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안타리우스에 의해 완전한 아귀다툼으로 변했다. 여전히 두려움과 분노와 경멸과 공포와, …일부의 경외의 대상이었던 절대적 소수자들은 현실에서 등을 돌려 환상 속에 휩싸였고, 그곳엔 나의 형제들이 속해있었다.
그들의 신념과 행동을 함부로 저울질할 권한은 나에게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신념으로, 나는 나의 신념대로 길을 걸어갈 뿐이니. 언젠가 한구석이 텅 빈 표정으로 나의 손을 잡았던 제레온 경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만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해야만 하는 것. 어렴풋한 어린 기억속의 수도원과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조금씩 맞아떨어지기 시작하자 급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끝없는 싸움. 정확한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로 꼭두각시놀음이라니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일까요, 포트 레너드의 안개를 이용해 무엇을 할 거라 생각하고?”
상념을 깨는 한마디에 인상을 굳히며 의자 옆에 세워둔 칼을 집어들었지만,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창가로 다가섰다. 커튼이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걷히고 붉은 빛을 내는 스탠드 빛 사이에 새어든 희미한 자연광이 종이위로 흘러 글자를 좀먹고 책을 넘기던 손을 적신다. 그리고 그 위를 부자연스럽게 덮는 그림자가 한참이나 자리에 머물러 미동조차 하질 않았다.
이젠 익숙하다고 느껴질 짙은 금발이 부서지는 달빛을 고스란히 빨아들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에 눈을 향하고 있자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그에 반사적으로 미간이 찡그려진다.
“결국은 피라미드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단지 위에 군림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게 단지 비능력자의 위인지, 능력자의 가장 위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뭘 말하고싶은거냐.”
그 이전에 어디로 들어온 거지. 창가를 등지고 선 탓에 윤곽이 선명하게 보이는 그는 마치 자신의 능력을 등에 업은 듯 한 착각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능력은 마치 달과 같았다. 단지 그 빛이라는 그 형상이 닮은 것이 아니라, 그 빛이 가진 속성이. 유전자를 조작하여 능력을 억제하고, 발생시키는. 잠시 생각을 멈추고 그의 뒤편, 창 밖에서 이미 갠 달이 반짝였다. 완전한 구형.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 바로 저것과 닮아있었다. 그 생김새를 눈동자로만 훑고있자니 불온한 기분에 눈을 감고야 만다. 달빛아래에서 시작된 잘츠부르크 축제, 이상향을 머금은 그 문을.
“도대체 뭘 위해서 자꾸 이곳에 오는 거지.”
“처음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다고.”
고개를 저으며 탁자에 놓여있던 책갈피를 책 사이에 끼어 넣고 숨을 뱉었다.
“네가 원할만한 물건은 적어도 이 집엔 없을뿐더러, 만약 있다고 해도 주지 않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단언하십니까.”
이곳은 본가를 떠나 가족과의 소식을 끊으면서까지 은밀하게 행동하기 위해 마련한 거처 중 하나였다. 그만큼 화려하다기보단 여느 중산층 가정의 집과 다를 바 없는 소박한 가구들만이 채워져있다. 무엇하나 특출하지 않은 물건들 뿐. 단지 그 뿐인 공간의 무엇이 탐난다고 할 만하단 거지?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래, 정 네가 그렇게 탐날만한 무언가가 있다면 부디 가지고 빨리 내 눈앞에서 꺼져라.”
“네, 딱 하나 있습니다. 당신 말이죠.”
“……이건 또 무슨 우습지도 않은 소리인지.”
의미 없이 소모적인 말의 반복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아직까지 손에 쥐고 있었던 책을 탁상위에 얹어놓고 온전한 칼 두 자루를 들어 언제든 싸울 수 있도록 매무새를 정돈했다. 칼집상태의 검을 허리에 완벽하게 자리 잡게 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볍게 한쪽의 칼을 칼집에서 살짝 빼내자 칼날을 달빛을 반사하며 빛났다. 그것을 눈으로 훑는 시선을 의식하며 다시 칼집에 소리가 나게 끼워 넣었다.
“한 번 더 묻지.”
“물으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은 생각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모양이니까요.”
말을 끊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에게 빠른 발도술로 왼손의 검을 목에 들이댔으나 여전히 올라간 눈꼬리는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당신에게 흥미가 있다는 소리를 그렇게까지 왜곡해서 들으셔야 합니까?”
“흥미? 단지 흥미인 것치곤 필요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오는군. 헌터라는 작자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게 있으니까요. 그리고 전 다른 헌터들과는 다릅니다. 그들은 어둠속에 숨어서 천천히 먹잇감을 노리고 조용히 어둠속으로 사라지죠. 전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저를 알아채고 노려온다면 이쪽은 환영일 뿐이니까요.”
여전히 목을 노린 칼이 번뜩였는데도 멈추지 않는 발걸음에 칼이 피부를 스쳤다. 눈과 눈이 또렷하게 맞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의 목에서 붉은 액체가 방울지는 모습을 묵묵히 보고 있었다. 얕은 상처지만 부위가 부위인 만큼 꽤나 아플 텐데, 입을 다문 채 이쪽을 향해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행동에 팔을 쳐내고 오히려 이쪽에서 한발을 내딛으며 강하게 말했다.
“더 다가오면 베겠다.”
“저런, 도련님답게 가드가 세군요?”
어깨를 으쓱이던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단지 먼지를 떼어 내려고 했을 뿐입니다. 뭐, 직접 닿아보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요. 라며 천연덕스럽게 입을 떼었다. 건방진 행동에 눈썹을 추켜올렸으나 오히려 그 행동이 긴장하는 이쪽의 힘을 쪽 빨아내는 것 같아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예 흥미를 잃고 검을 거뒀다. 쓸데없는 논쟁을 계속하느니 차라리 오늘밤까지 여기서 묵고 다른 거처로 옮기는 편이 편할듯했다.
“돌아가라.”
잡다한 피곤함이 밀물처럼 몰려와 뻐근할 정도로 어깨가 무거웠다. 상대하고 싶은 마음도 없던 차에 노곤함이 내려앉자 이젠 그에 대한 생각이 모두 논외의 것이 되었다. 완전히 몸까지 외면하고 방의 한구석에 자리한 침대에 몸을 눕히기 위해 한 발을 떼기도 전에.
“이럴 때만 빼고요.”
머리카락이 들어 올려지는 감각에 고개를 돌리려했으나 그 전에 목에 닿아오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놀라서 굳은 몸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그는 방금 전보다 빠르게 거리를 벌리고 씩 웃고 있었다. 무엇을 한지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벙찐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자 손짓으로 키스를 날리는 광경에 칼을 집어들었으나 그대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리는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표정관리는 생명 아닌가요, 벨져?”
3층 건물의 창문으로 뛰어내린 주제에 멀쩡하게 길가에 서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목소리는 꽤나 멀리 있음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를 갈며 칼을 던져서라도 저 머리통을 뚫어버리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을 눈치 챘는지, 그는 흔들던 손을 멈추고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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