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멜빈] 사이퍼즈

너모 길어졋다
사실 더 쓰고싶은 게 있었는데 오늘 안에 다 쓰기로 마음먹었고 12시면 자야하므로 지금 업로드하고 나중에 갈아엎던가 해야겠오




 동물의 체내구조는 꽤나 복잡하고도 간단한 메커니즘으로 되어있다. 각 근육의 조화로운 움직임, 세포의 연동. 쉴 틈도 없이 움직이는 바쁜 운동 사이에서 일부의 장기가 멈추면 단숨에 무너져 내리는, 마치 도미노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또 세포에 새겨진 정보를 교란시키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이해했을 때는 내가 단지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항상 할아버지의 실험실에서는 알 수 없는 소리가 가득했다. 쇠가 맞물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세포조직을 헤집는 특유의 물기어린 소리와 그에 어울려 묻어나는 내음.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생물이 뿜어내는 그 짙은 냄새가 굳건히 닫힌 두꺼운 철문을 넘실댔다. 지금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벽을 쓰다듬으며 종종 그곳을 떠올린다. 시각적으로는 절대 볼 수 없도록 숨겨진 비밀스러운 방. 그 때문에 오히려 자극적이라도 하던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보지 않아서 궁금한 판도라의 상자처럼.

 

 그곳은 함부로 들어와선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엔 자의든 타의든 꽤나 성실하게 행동했다고 지금에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굳이 말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진 못하지만, 만약 말하게 된다고 하면할아버지의 말은 절대적으로 따라서, 평소라면 그 문을 보기는커녕 그 앞을 지나가지도 않았다. 유일한 친구였던 토끼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그 때가 아니었다면.

 

 고된 하루 일정은 익숙해져있었고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 일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매일 같은 장소에서 흙을 가지고 놀고 있던 아이에게 어제 용기를 내어 겨우 이야기를 나눴던 아이가 다음날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간다던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할아버지 이외의 가족이 남겼다고 하던 투박한 오르골을 내 손으로 찢어발기고 모든 조각이 눈앞에서 차가운 금속음을 내는 기계로 재조립해버린다던지. 닳고 닳은 우물에선 물이 솟아오르지 않는 것처럼 무덤덤한 일상이었고 나는 그에 수긍했다. 하지만 단 한가지만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유일하게 함께한 나의 작은 친구.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항상 그곳에 있던 아이는 털 한 올마저도 남기지 않았다. 바닥에 놓여있던 밥그릇이 있어야 할 곳에는 카펫이 깔려있었다. 그것을 보자 마치 어딘가가 고장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벼이 생각을 전부 날려버리고 집안을 뒤지며 헤맸다. 작기도 작았지만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아 쪼그라든 폐를 쥐어짜고, 지쳤을 때는 조금씩 쉬면서도 눈을 계속 굴렸다. 온기조차 남지 않은 모든 집안에서 남은 장소는 한곳뿐이었고, 어느새 두려움을 밀어내고 자리 잡은 넘치는 호기심과 강렬한 자극에 침을 삼키며 문손잡이를 움켜쥐었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풍경과, 똑똑히 들려오던 사랑스런 친구가 내뱉는 째깍임.

 

 

 

 드라이버를 돌리던 손을 멈추고 고글을 벗어 내렸다. 인상을 찌푸리며 내려다본 손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눈에 보일정도로 제 감각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쥐고 있던 제피를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딱히 먹은 건 없었지만 금방이라도 위에서 무언가가 차오르는 느낌에 목구멍이 막히는 기분이 든다. 째깍, 째깍. 어디선가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주변의 고요를 집어삼키고 부피를 늘려간다. 째깍, 소리의 근원지를 찾으려고 고개를 든 순간 세상이 한 바퀴 돌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를 비웃듯 한쪽 뺨을 타고 오르는 한기와 평소보다 유난히 무거운 몸에 그제야 스스로가 넘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째깍. 일어나려고 애를 써도 역으로 모든 힘이 쭉 빠져나갔다. 몸을 꿈틀댈 여력도 남지 않아 몸을 축 늘어트린 상태 그대로 눈동자만 움직였다.

 

 조금 곤란하네. 항상 위험한 상황이 오기 전에 경고음을 울리던 제피LR을 찾으려고 해도 이내 책상위에서 분해된 채로 수리를 기다리고 있단 것을 깨달았다. 영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최근 제피의 미미한 오작동이 늘어나 이를 고쳐야한단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작 행동하기엔 너무 성가시고 귀찮은 점이 많아 여러 가지 변명으로 일을 미루고 있다가, 몇 시간 전에 제피L이 리첼의 방에서 그녀의 마이크를 엉망으로 만드는 바람에.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나온 잔소리에 등떠밀려 방에 강제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멍한 시야의 구석에 거꾸로 뒤집어진 채 하늘을 향한 의자의 바퀴가 아직도 느리게 구르고 있다. 의자가 넘어질 정도였다면 큰소리가 났을 텐데도 왜 자각하지 못한걸까. 아직도 쟁쟁하게 울리는 째깍임에 그 생각도 이내 묻혀버렸다.

 

 누군가가 도와주러 오지 않으려나. 바닥에 닿은 얼굴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한숨을 삼키고 가만히 누워있자니 기계를 고치는데 큰소리가 난다한들 기계를 수리하는 도중에 새어나오는 소리라고 생각하지 엔지니어가 쓰러져있단 생각은 하지않을거란 사실을 깨달았다.

 

 문까지의 거리는 단지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다섯 번만 걸어도 다다를 만큼 가까웠지만 걷기는커녕 자리에 앉을 힘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든 몸뚱이에 입술을 물어뜯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평균과는 한참 동떨어진 체력을 가지고 있던 주제에 이제와 몸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칭얼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그렇지 않았대도 이젠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것 같지도 않고, 마냥 기다린다고 체력이 쉽게 돌아오지도 않는다는 건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도움을 청할 것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했어야겠지. 이미 목소리를 낼 힘은 남아있지도, 남아있었다고 해도 낼 생각도 없었다. 머리 한구석이 마비된 듯 두뇌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톱니바퀴소리에 세뇌당한 머릿속이 결국 텅 비어버렸다. 눈꺼풀을 움직이는 것조차 힘겨워지기 시작해 아예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더욱 짙어진 소음에 몸을 맡긴다. 차가운 기계덩어리의 안에 가라앉은 몸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떨어져내렸다.

 

 

 

 

 

 째깍째깍, 손에 닿은 작은 생명에선 인위적인 향기가 났다. 생물이 내뿜는 열기와, 특유의 향내가 아닌 인공적인 기름의 냄새. 째깍째깍, 나만의 친구, 단 하나뿐일 친구.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주고, 입력한대로 움직여주는 나의 하인. 감각을 지워버리고 남은 자리에 존재해온 것은 무엇이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서 뒷전으로 미뤄두었던 그것은? 빙글빙글 도는 톱니바퀴에 끼어서 사라질 것만 같아.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붉은 폭죽. 시큼한 오일 향기. 죽여, 죽여야 해. 자극적인 향에 긴장한 위가 울렁였다. 네 손으로 죽여. 너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라. 달라? 무엇이? 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빙글. 사방으로 휘어지고, 바닥에 뒹구는 안구는 번쩍인다. 랭커스터. 아아, 사랑스러웠던 붉은빛. 손에 닿은 부분부터 붉게 타오르는. 신비할 정도로 길쭉한 귀, 구멍 난. 몸뚱이를 그러안았다. 양손으로 움켜쥔 그것은 입을 벌리고 말했다. 째깍. 비명이 경고음으로, 경고음이 목소리로, 누구의? 찢어지는 소리에 널브러진 귀를 틀어막았다.

 

 “멜빈!”

 

 귀를 막은 손을 잡아오는 손길에 눈을 떴다. 열린 문틈에서 들어오는 빛이 눈부셔 인상을 찌푸리자, 그걸 알아챘는지 얼굴을 다른 손으로 가려주는 배려에 조금은 감사하며 드리워진 그림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곱실대는 금발이 문밖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바깥에서 막 돌아온 듯 차가운 공기를 휘감고 있는 그는 어둠속에서도 여전히 푸른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걸까. 누워있는 상태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창가는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한 오후 11시정도 되려나. 6시간, 정도일까. 굳은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고민하고 있으면, 조심스럽게 얼굴에 닿아오는 차가운 손길에 눈을 찡그렸다.

 

 “이런, 미안해. 방금 돌아와서 좀 차가우려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지만 이내 자신의 심정을 대신 말해줄 제피가 책상위에 분해된 상태로 놓여있다는 걸 깨닫고 작게 괜찮아, 라고 대답하자 다행이라는 듯이 환하게 웃어 보인 그는 일어날 수 있겠어? 라며 바닥에 쓰러진 내 몸을 조심스럽게 부축해서 일으켜주었다.

 

 “세상에, 얼마나 이러고 있던 거야. 몸이 차갑잖아. 어떻게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찾지 않은 거지?”

 

 그 말을 하며 문밖을 노려본 그의 행동에 문 너머에서 당황한 리첼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작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여전히 차가운 손의 감촉에 흠칫했지만 조금 더 강하게 힘을 줘 쥐어보이자 한숨을 쉬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운 뒤에 나를 앉히고 방문을 닫고 불을 켰다. 갑자기 밝아진 주위 환경에 양 눈을 찌푸렸지만, 작게 여러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익숙해져 눈을 제대로 떴을 때엔 평소와 같이 나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이야?”

 

 멀리에 있던 또 다른 의자를 끌어와서 내 반대편에 앉은 헨리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말한다고 과연 어디까지 믿어줄까, 끽해야 정신병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텐데. 무엇보다 귀찮고.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딴청피우지 말라며 얼굴을 잡아오는 손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그래. 항상 제피가 체크해줘서 나태해져있었어.”

 “내가 그럴 줄 알았지, 내가 그러니까 평소에도 뭐 좀 먹고 운동도 좀 하라고 했잖아. 그러다가 진짜 몸 삭는다.”

 “최소에너지는 섭취하고 있고,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해결해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괜찮잖아.”

 “그래도 안 돼. 걱정된단 말이야.”

 

 단호한 말에 급격히 피곤해지는걸 느끼며 뚱하게 퉁명스럽게 너, 굉장히 리첼같아. 라고 중얼거리자 용케 알아들었는지 큰소리를 내며 화를 내서 반사적으로 놀라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한참 반응이 없다가 이내 내 가볍게 이마에 손가락을 튕긴 그는 빨리 제피나 고치라고 손짓했다. 고개를 끄덕이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있는 도구와 제피들을 손에 쥐었다. 나사를 풀다 만 상태로 놓여있어 혹시라도 잘못된 건 아닌가 고민했지만 그렇게 쉽게 손상될만한 재질도 아니란 걸 알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철판을 고정하던 나사를 모두 풀어내고 안의 단자를 조심스럽게 확인하는 와중에 여전히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돌리자 아직도 여전히 그 의자에 앉아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헨리가 보였다. 이상할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게 뭔가 잘못이라도 한 어린애 같아서 무표정으로 쳐다보자 그런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불쾌한 일만 아니면 좋을 텐데. 별 이상이 없는 듯 한 제피 L의 세밀한 기계장치에 브러시로 가볍게 먼지를 털어주고 분해했던 순서 그대로 조합을 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완전하게 조립한 뒤 전원을 켜자 몇 초 뒤에 화면에 표정이 나타나며 파닥거리며 날아오르는 모습에 안심하며 제피 R에 손을 댔다.

 

 “할 말 있어?”

 

 똑같은 방식으로 R의 상태를 확인하는 와중에 시야의 아슬아슬한 끄트머리에서 이젠 안절부절못하는 상태를 넘어서 다리까지 떨기 시작한 모습에 어이가 없어 고글을 낀 채로 말하자 움직임이 멎는 게 보여 이제 좀 가만히 있으려나. 하며 오롯하게 제피R에게 관심을 쏟아 이상하게 연결이 약해진 부위를 조정하고 다시 원래대로 복구시킨 후에 고글을 벗고 난 후에야 바로 옆에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오랫동안 한 곳을 보느라 뻐근해진 목을 이리저리 풀며 말을 걸자 답지 않게 무언갈 고민하는 것 같아 옆에서 퍼덕이고 있는 제피L을 가볍게 던졌다. 반사적으로 공을 받듯 제피를 잡은 헨리는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운 것처럼 자신의 주변을 날아다니는 제피L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스스로의 모습을 자각한 건지 헛기침을 하며 멈춘 그는 자신의 어깨 위에 앉은 제피L을 쓰다듬으며 반대쪽 손으로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아 내밀었다.

 

 “뭐야?”

 “놀이공원 표, 이번 주 주말이야.”

 “그래?”

 

 별로 크게 관심 가는 주제는 아니었는지라 시큰둥하게 대답하자 입술을 삐죽 내민 그는 제피L에게 무언가를 꿍얼댔지만 신경 쓰진 않았다. 제피R의 가동도 원활하게 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향하려고 하는 날 붙잡는 손목에 머리를 헤집으며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싶은건지 말하라고 손을 휘저었다.

 

 “같이 가지 않을래?”

 “귀찮아. 피곤하고, 춥고.”

 “그러지 말고, 너 한 번도 놀이공원 가본적 없다고 했잖아.”

 

 그의 간절한 몸짓에 눈썹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굳이 밖에서 물리적 가속도와 높이, 관성, 각 재료들의 화학적 조합을 체험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방법이 아니어도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은데. 만들어볼까.”

 “로맨틱하지 못하긴. 그런걸 느끼려고 하는 건……맞지만. 좀 더 다른 느낌이라고.”

 “어디가?”

 “같이 놀러 가면 좋잖아.”

 

 의미를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제피L이 액정에 ? 모양을 띄우며 의문의 표현을 찾는 음성을 뱉어냈다. 자주색 점퍼에 손을 넣고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는 빤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 저 눈빛은 항상 예전의 작은 친구를 떠올리게 해서 쉽게 거부할 수 없었다. 인상을 찌푸렸지만, 평소에 그가 나에게 대해주는 걸 생각하면 한번쯤은 자신도 그의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썩 내키진 않지만 등가교환이지. 탁자 옆에 놓인 식은 머그컵을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표정이 풀린 그는 그럼 토요일 오전에 마중 나올게! 라고 기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아왔다. , 상관없나. 그의 밝은 모습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왔다. 네가 기쁘면 괜찮을지도. 옆에서 날아다니던 제피R이 기쁨의 표현을 찾으려는 것을 손목의 스위치를 눌러 막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전에 했던 생각들 다 취소. 피곤함과 울렁이는 속에 벤치에 앉아있어도 세상이 찌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괜찮냐고 토닥이는 헨리의 손이 마치 악마의 손길 같아 째려보자 어색하게 웃었다. 머리에 쓴 괴상한 동물 머리띠도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간 그의 텐션이 하루 종일 내내 텐션이 내려가 있을 것만 같아 차마 하지는 못하고 속을 썩였다. 신선한 체험이라면 체험이었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어떤 느낌일지 전부 계산을 하고 따라 탔지만, 그것을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달랐다고 해야 하나. 처음 회전목마나 범퍼카까지는 그저 그렇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 이후의 놀이기구의 덕분에 완벽하게 깨져버렸다. 롤러코스터를 타고나서부터 울렁이는 속을 삭이고 있으니 미안하다며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타자는 그의 말에 그대로 벤치에 눕고 싶었다.

 

 “정말 꼭 타야만하겠어?”

 “, 이건 놀이공원에 오면 꼭 타봐야 하는 거니까.”

 “……하아, 빨리 타고 돌아가자.”

 

 알겠다며 손을 이끄는 그를 따라 힘없이 질질 끌려간 곳 앞은 여러 가지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져있는 관람차였다. 관람차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앞에 바글 하게 모여 있는 인파에 진저리가 난다. 눈앞에서 돌아가는 관람차의 자리는 총 8. 적어도 우리 순서가 오기 전까지 타야하는 사람들은 적게 잡아도 30명은 되어보였고, 한 번에 타는 최소 인원수인 2명으로 잡는다고 하면, 관람차가 돌아가는 속도와 사람들이 갈아타는 속도까지 대입한다고 쳐도 다 타기위해서는…….

 

 “헨리, 역시 포기하자.”

 “여기까지 왔잖아. 조금만, ?”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는 긴 줄을 보며 한숨을 뱉어도 옆에서 어깨를 두드리며 달래는 헨리의 행동에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그 옆에 얌전히 서있는 수밖에 없었다. 입에서 새어나오는 입김이 눈앞에 아른댄다. 추위에 몸을 움츠려도 여전히 엄습하는 한기에 눈을 꾹 감았다.

 

 “멜빈?”

 

 옆에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에도 고개만 저으며 어깨에 엉성하게 두른 목도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자, 얼굴 한쪽을 꼬집는 손길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지 마…….”

 

 추위에 신경이 둔해져 고무 같은 느낌이었지만 미미하게 느껴지는 아픔에 살짝 노려보자 몸을 약간 숙이고 눈높이를 맞추던 그는 목에 두른 목도리를 풀어헤쳤다. 노출된 목에 닿는 공기에 어깨를 바르르 떨며 인상을 찡그리자 목도리를 깔끔하게 펴고 절반으로 접어 다시 내 목에 매주는 행동에 무슨 말을 쏘려고 했던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매. 추우면서 그래.”

 

 얌전히 목도리에 입을 묻고 말을 아껴도 심정을 대신 말해줄 제피는 아마 전원이 꺼진 채로 고이 방의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찬 공기가 닿았던 느낌은 아직도 남아있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손을 더욱 깊게 집어넣으며 몸을 웅크렸다. 주머니에 넣어둬도 시려운 손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으니 방에서 나를 반길 난로가 떠오른다. , 따뜻한 집에 있고 싶어. 사람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도 않고 시간은 너무나도 길게 느껴진다.

 

 “많이 추워?”

 

 고개를 끄덕이자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한 손을 턱밑에 대고 신음을 흘리던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다가왔다.

 

 “뭐해……?”

 “, 이러고 있으면 따뜻하지 않을까 싶어서.”

 

 뒤에서 양팔로 끌어안는 손에 어이가 없어 묻자 천진난만하게 나오는 대답에 말을 잇지 못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고 묻자 바깥공기보다 자신의 체온이 더 따뜻하니 당연한 것 아니겠냐고 하는 말에 어이가 없어 반박을 못하고 있으니 강해지는 힘에 팔을 들어 가볍게 명치를 툭 건드리자 알겠다는 것처럼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줄을 기다리는 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말하고 이쪽에서 조용히 듣는 방식이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자신의 여동생, 캐럴의 이야기부터 첫 임무를 나갔을 때의 이야기물론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 정도로 뭔가 중요한 내용을 알고 있는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큰 관심은 없었다.라던가, 한 이야기의 주제가 떨어지면 다른 이야기로, 또 다시 다른 이야기로. 실을 이어가듯 조심스러운 발언을 듣고 있으면 어느새 이야기는 뒷전으로 흐르고 그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집중을 하게 된다. 차분하고 안정된 목소리.

 

 “그래서 내가……, 듣고 있어?”

 

 잠이 올 것 같아 뒤에 있는 헨리의 몸에 서서히 체중을 실었더니 정수리를 가볍게 두드리는 감각에 어깨를 늘어트리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뭐가 또 문제인지 한 번 더 강하게 끌어안는 느낌에 뱉은 숨이 눈앞에서 뿌옇게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제발 말로 해. 그러다가 목소리 잊어버리겠다.”

 “추운걸.”

 

 여전히 감각이 둔한 손가락을 만지작대며 말하자 그걸 알았는지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장갑을 벗어 건넸다. 고개를 저었지만 손에 닿은 부드러운 감촉을 이기기는 힘들었다. 방금까지 끼고 있던 덕에 온기가 남아 표정이 풀리는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덜 춥게 이야기를 해.”

 “……말하는 게 에너지 낭비.”

 “또 그런다, .”


 속으로 혀를 내밀고는 거의 끝에 다다른 줄이 얼마나 더 남았나 계산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려는 찰나 팔을 움찔대며 다가오는 모습이 끄트머리에 걸렸다. 설마 하는 느낌에 몸을 슥 뒤로 빼자 뺨을 잡으려는 손길을 겨우 피했다. 어이없어하는, 당황한 얼굴로 눈썹을 추켜올린 그에게 슬쩍 입 꼬리만 슬쩍 올려주자 약이 오른 건지 소리를 높이며 어떻게든 차가운 손을 몸에 대려고 난리를 치는 그를 피하기 바빴다.

 

 “저기 손님, 뒤에서 다른 손님들이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는 데.”

 “, , ! 너 진짜. 빨리 가자.”

 

 정신없이 장난치는 걸 피하는 와중에 저 멀리서 언짢게 이쪽을 바라보는 남성의 표정에 몸을 움츠리며 헨리를 손가락으로 꾹 찌르자 뜨끔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내 손을 잡았다. 속도를 내는 발걸음에 천천히 가라고 투덜댔지만 들리지도 않는 건지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을 종종대며 따라잡았다. 눈앞에 놓인 철제기구는 멀리서 볼 때보다 더욱 불안해보였다. 표정을 굳히며 정말로 타야겠냐는 표정으로 먼저 탄 헨리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시간이 없다며 재촉하는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발을 올리자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끼익 거리는 금속음을 냈다.

 

 천천히 중력을 거스르는 느낌과 여전히 찝찝한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그것을 아랑곳 않고 밖을 보며 경치자랑을 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힐끗 본 풍경은 사진으로 본 그것과 비슷했고, 큰 감흥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여전히 불안한 장치에 몸을 맡긴 불안감에 발을 구르지도 못하고 괜히 손을 만지작댔다.

 

 “맘에 안 들어?”

 “조금.”

 

 그는 내 찝찝한 표정을 읽은 듯 어색하게 웃어보이곤 이내 입을 다물고 창밖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한참 말하던 사람이 조용해지니 좁은 공간 안에 끼릭대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이상한 기분에 멀뚱하게 그의 옆모습을 보다 그의 시선을 쫓아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전과는 조금 다른 풍경, 점점 물들어가는 하늘에 반항하듯 조금씩 커지는 놀이기구들의 불빛들이 묘하게 화합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뭐가 다른 거지? 입을 일자로 굳히고 이유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훑고 머리를 굴려 이모저모를 따지는 와중에 손을 잡는 감촉에 현실로 끌려 나왔다.

 

 “멜빈.”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과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잘 어울려서 구부정하게 있던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이상한 감정이 심장에 일렁였다. 드디어 속이 안 좋다 못해 그쪽까지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스로도 비상식적인 상상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 위에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왔다. 헨리와 있으면 모든 게 이해를 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기에.

 

 “대답해줘, 멜빈.”

 “?”

 

 계속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바늘이라도 된 건지 따끔거려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괜히 고개를 돌리고 그만하라는 의미로 내 손을 잡은 손을 털어내려했지만 놓지 않겠다는 결의라도 한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 손에 얼떨떨하게 다시 눈을 마주치자 그 눈동자는 여전히 평소의 활기찬 느낌과는 다른 감각이 공허한 문을 비집고 나왔다.

 

 “나랑 있는 거, 불편해?”

 

 예상치도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는 눈짓으로 대답을 촉구했다. 애초에 싫었다면 같이 나오지도 않았을 걸 알면서. 입을 다물어도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행동에 제피의 존재를 간절하게 떠올렸다.

 

 “……싫지는.”

 “지금은? 이렇게 내가 말하는 것도 불편하지 않아?”

 “불편하다기 보단.”

 

 헨리가 뱉은 말에 스스로도 생각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답을 뱉어내고는 다시 말이 멈췄다. 무슨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뱉어보지 않은 언어는 단지 지식에 불과했고, 그것을 더듬어가며 구체화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푸른 눈을 깜빡이며 긴 시간의 감별을 묵묵하게 침묵으로 기다렸다.

 

 “어색하다고 할지.”

 “……그래? 그럼,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손을 잡은 채 벌떡 일어서자 불안정하게 기체가 약간 기울었다. 눈을 따라 들자 옆으로 다가와 앉아 급속하게 눈과 눈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이것 또한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뒤로 물렸지만 넓지 않은 공간에서 그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그에게는 큰일이었던 걸까. 어색하게 웃는 표정으로 여태 잡았던 손을 쉽게 놓아버리곤, 그 안에서는 씁쓸함이 번져나갔다. 그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해서, 스스로 먼저 손을 붙잡았다.

 

 “나쁘진 않아.”

 “정말로?”

 

 의외의 행동이었는지 눈을 크게 뜬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급하게 감추려는 것처럼 얼굴을 손속에 파묻었다. 이미 다 봤는걸.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해 우물거리다 예전에 그가 나에게 해줬던 일을 떠올리며 구부린 등을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그에 잠시 멈췄던 떨림이 강해져 멈추지도 못한 채로 계속 등을 토닥였다. 그 손틈 사이로 이상한 감각이 새어 들어와서 반대쪽 손으로 심장에 손을 얹었다. 두근, 두근. 뛰는 소리가 기긱거리는 기계소리를 덮어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힘이 드네.”

 “그래? 네가? 의외네…….”

 

 떨림이 잦아든 등이 평소처럼 펴졌지만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 새어나온 목소리에 보이지 않는 물기가 배어있었다. 일렁임이 심해진 가슴에 뇌까지 기능을 저하시켰는지, 그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답지 않은 행동에 피식 웃으며 등을 쓰다듬던 손을 그의 머리카락으로 옮겼다. 투명하지 않을까 싶을 연한 빛의 금발은 창백한 전구의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웃음처럼. 반짝반짝 거렸다.

 

 “나라고, 모든 걸 다 말하지는 않으니까.”

 

 알고 있어. 무덤덤한 말을 속으로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가,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괜히 머리카락으로 장난을 쳤다. 여전히 반응 없이 바닥을 보고 있는 시선에 심통이 나 더 심하게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말기도 하고, 만지작대자 그제야 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으로 내 손을 밀어내는 행동에 그 손을 다시 맞잡았다.

 

 “그렇다면, 말하면 되잖아. 들어줄 수 있어.”

 “……네가?”

 “조금이라면.”

 

 정말 안 어울리는 거 알지? 어깨를 들썩이며 하는 말은 평소처럼 웃음기가 담겨있어서 텅 빈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이상하게 일그러진 표정, 눈물로 뒤덮인 얼굴 속에서 평소처럼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 하늘같이 반짝이는 예쁜 눈. 창밖의 작은 반짝임을 담아낸 듯 한 그 눈동자가 눈물로 덮인 게 너무 안타까워서 답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 손가락이 그의 눈물로 젖어갔다.

 

 “나는, 나는.”

 “…….”

 

 탁하는 소리와 함께 앉아있던 자리가 크게 흔들렸다. 그제야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남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해가는 것을 보고는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관람차의 문을 열고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나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풍선 같은 소리를 냈다.

 

 “이상하네, 오늘은.”

 “뭐가?”

 

 이런 곳에 이 시간까지 나와 있고. 이런 너의 모습도 보고. 뒷부분은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소에는 의식할 일도 없던 하늘을 저 단순한 기계 하나에 탔다는 이유 하나로 시선을 빼앗겼다. 의식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마치 너의 닿아오는 손길이 이상하게 따뜻하다는 걸 느낀 것처럼.

 

 “나는. , 그런 모습도, 싫어하진 않아.”

 “……나도야.”

 

 내가 무슨 행동 했었어? 의아하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눈가만 빨갛지 않다면 방금 전 그 일은 있지도 않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짱한 얼굴을 한 너는 평소처럼 씩 웃으며 말했다.

 

 “나도 너의 그런 모습도 좋아해.”

 

 망가진 네 모습조차도. 무언가를 꿰뚫은 말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오늘은 유난히 몸의 이곳저곳이 바쁘잖아. 차가운 손을 가슴에 얹었다. 모든 사실을 들킨 것처럼 이상한 기분이 온몸을 뒤덮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그게 너여서? 웃는 표정의 너를 보고 따라 웃었다. 그 날은 유난히 날이 찼고, 나는 너의 장갑 한쪽을 나눠끼고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맞잡은 채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란히 감기에 걸려 앓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래, 지금까지도 선명했다. 그 후에 받은 편지조각을 몇 번이고 읽어 내렸다. 이리저리 구겨지고 젖었다 말라 뻣뻣해진 그 편지의 끄트머리에는 네가 적어내린 마지막 말들이 가득 차있었고, 그 말은 여전히 피부아래에서 꿈틀댔다. 나도야, 나도 그랬어. 대답을 들을 상대가 없는 말은 공허하게 허공에서 녹아내린다. 따뜻한 날이었다. 때에 맞지 않는 눈이 내렸고, 나는 여전히 혼자 대답을 중얼거렸다. 눈이 쌓이고, 쌓여서 네가 있는 곳을 덮어 내렸다. 차라리 저게 비였다면, 내가 담은 감정을 다 씻어 내릴 수 있다면. 긴 금발이 흩날렸다. 익숙한 옷을 입은 뒷모습에서 흘러내리는 감정이 도로 차올랐다. 다시 돌아오면, 제대로 이야기해주기로 했잖아. 빨리 돌아와. 헨리.

 

망가진 네 모습조차도 사랑할 수 있어.

 

손에 쥐어진 종이쪼가리가 또 다시 젖고 잉크가 의미를 알지 못하게 번져버렸지만 내용만은 바래버리지 않고 손 안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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